독서/경제2016. 3. 15. 19:39



위대한 탈출
국내도서
저자 :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 이현정,최윤희역
출판 :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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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Escape (Paperback)
외국도서
저자 : Deaton, Angus
출판 :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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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 논란에 한번 읽어보기로...

국내 모 일간지에서 이 책을 번역하며 Preface 등을 삭제, 축약하고 본문 중에서도 구미에 맞게 바꾸었다는 지적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심지어 원래 출판사인 Princeton University Press에서도 번역상에 문제가 있다는 발표를 하여, 결국은 오역을 바로잡고 새로이 책을 내게 된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책이다.

사실 오역 논란이 있지 않았더라면 굳이 찾아서 읽어보진 않았을 책인지라, 국내 출판계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좋은 계기였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만 실제 그 학자의 연구 성과를 접하는 일은 비전문가로서는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마침 앵거스 디턴이 써놓은 대중서가 있었기에 괜찮은 학자의 괜찮은 사회과학 교양서란 어떤 걸까 하는 궁금증에 굳이 책을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단, 내가 읽은 책은 국내 번역본이 아닌 원서였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의도도 컸고, 아무래도 오역 논란이 한번 있었으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우선 말해놓자면 세간에서 논란이 되는 토마 피케티의 책과의 비교는, 학문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때 전혀 타당하지 않다. 무슨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하고 말 것도 없이, 이 책이 불평등을 조장하고 피케티는 불평등을 비판하고 식의 단순화가 전혀 맞지 않다. 피케티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기에 할 말이 없지만, <위대한 탈출>에서 말하는 경제성장의 촉매제로서의 불평등이란 우리가 그냥 범박하게 생각하는 '불공정함'과는 거리가 있다. 


성장과 불평등은 동전의 양면

책에서 재미있게 읽은 내용들을 뽑아 개조식으로 소개해보겠다.


Part I은 Life & Death라 하여 인류의 보건 발전사를 다루고 있다. 

1. 아이를 살리는 것과, 보다 나이든 이(특히 노인)를 살리는 것 중에서 전체 인구의 기대수명을 크게 올려주는 것은?

아이를 살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중보건과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초기에는 기대수명이 빨리 올라가다가 정체된다. 즉 Aging of Death(죽음의 노화) 현상이 등장한다.

이는 아이들의 죽음을 먼저 막게 되고, 뒤이어 노인들의 생명도 연장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 살면서 많은 기회를 가진) 아이를 살리는 것과, (많은 경험을 했으나 살 날은 조금 덜 남은) 노인을 살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윤리적 판단은 별개라고 저자는 확실히 밝힌다.

2. 개발경제학 책들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지만, 빈국에서 의료 서비스의 질이 낮은 이유는 주로 의사-간호사의 태만에 있다. 지금껏 읽어본 책들에서 나오는 빈국의 의사-간호사들은 출근을 잘 안하고, 형편없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월급을 다 받아 챙긴다. 반면 사설 병원은 수요자들에게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대신에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해준다. (이 책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조금 미심쩍은 서비스를 받게 되더라도 바로 무언가 치료를 해준다는 점에서 사설 병원을 찾는 케이스가 있었다)

3. 부국의 경우 심혈관질환 사망률이 전부 급감했고, 심지어 국가간 차이도 줄어들어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유는 심혈관질환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예방할 수 있고, 기술의 확산이 잘 일어났기 때문이란다. 반면 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국가별 차이도 크고 심혈관질환 사망률처럼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암 치료 비용이 비싸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심혈관질환 사망률이 하락하면서, 원래는 심혈관질환으로 죽었을 사람들이 암으로 죽을 수도 있는 법이므로 확실히 알 수는 없다. 


Part II는 Money. 미국과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을 집중 조명한다.

1. 미국의 빈곤선(poverty line)은 60년대인가 존슨 대통령 시절에 약 3000달러로 정해졌다. 4인 가족이 필요한 식료품비를 가지고 계산한 것이라는데,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대중이 들었을 때 그냥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과연 저런 식으로 계산하는 게 정말 '빈곤'선일까? 심지어 빈곤선을 계산하는 방식은 그 뒤로 바뀌지 않았다. 당시의 3000달러에 인플레이션율을 곱해서 물가상승만 반영하는 식으로 계속 올리고 있으니, 조금만 잘 생각해보면 전혀 현재 실정에 어울리는 빈곤선일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빈곤선이 실제로는 더 올라야 했고, 그러면 빈곤율이 더 올라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미국의 빈곤선을 절대적 수치로 정해놨지만 미국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생존을 위협받는 빈곤을 겪는 나라가 아닌, 각자가 처한 상황, 속한 사회에서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수준이 될 때 '빈곤'하게 되는 나라이므로 상대적 빈곤선이 적절하다고 한다.

2. 노동시장과 불평등에 대해서 흥미로운 경제학 이론을 인용한다. 임금이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교육과 기술의 관계로 정해질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산업기술이 요구하는 수준의 인재들이 충분히 배출되면 임금도 내려가고 교육의 가격도 내려간다. 그러나 기술이 앞서서 교육이 기술에 뒤쳐질 경우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고임금이 주어지고 교육의 가격도 오르는 식으로 '경주'가 벌어지며 임금이 정해진다는 것.

3. 세계적으로 빈곤선을 정한다는 것은? 세계은행에서는 하루 1달러를 빈곤선으로 정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각 나라의 화폐를 실제 '구매력에 맞게' 환산한 환율이다(Purchasing-Power Parity Exchange Rate). 문제는 바로 이 PPP를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에 있다. 저자는 영국 출신이다보니 흥미롭게도 '마마이트(marmite)'의 예시를 든다. 영국보다 미국에서 마마이트에 대한 수요가 적고 수입품이다보니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영국에서 마마이트를 사는 것만큼 미국에서 사려면 훨씬 비싼 돈을 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사람들의 구매력이 월등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전세계의 구매력을 보정하여 미국 달러로 환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일률적인 빈곤선을 정하는 것 자체에 담긴 난관이 있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PPP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봐서는 안된다고 한다. 한편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빈곤선이 정해지는 방식이다. 보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빈민들을 직접 조사해 가며 '갤럽'식으로 얻은 빈곤선에 비해서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기구가 정하는 빈곤선은 정당성이 약하다.

4. 국가간의 불평등과 인류의 불평등은 다르다. 인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았을 때 국가간의 불평등이 시정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중국이나 인도에서 볼 수 있듯이 막대한 수의 인구가 경제성장에 힘입어 저소득층을 탈출한다면 인류 전체로 놓고 보았을 때 꼭 불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올림픽에서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처럼 소득에 따라 실제 사람들이 줄지어서 행진한다면, 중국 및 인도의 상당수가 이전보다 앞으로 왔기에 전체 인류의 관점에서는 덜 불평등할 수 있다고 한다. 


Part III는 Help다. 저자는 여기서 국내적 불평등에 대한 실제적 조치를 논하기보다는,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 공여되는 Aid, 즉 해외원조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Aid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ODA를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1. 저자는 우선 Aid의 "hydraulic" 접근에 대해 비판한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마치 파이프를 통해 물을 흘려보내 주면 물이 가 닿듯이 원조를 주면 받아먹고 쑥쑥 성장하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한 Aid는 수원국이 아닌 공여국의 동기 유인에 의해 주어지는 경우(예를 들면 예전 식민지 국가에 대하여 주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 사람이 아닌 국가를 염두에 두고 주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인구 규모가 작은 나라들이 인구 대비 많은 원조를 받는 경향이 있다.

2. 무엇보다 저자는 Aid가 민주적 정치 제도를 망치기 때문에 중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특정한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할 것을 납득시키고 세금을 부과하여 실행해야 하는데, Aid를 통해 주어지는 금액이 막대하다보니 민주적 정당성 없이 독재 정권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잘 굴러가고 있던 나라에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도 물론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프리카 국가들이 수출하는 재화의 가격이다. 각종 광물이나 농산물의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이 그 재화의 가격이 급등할 경우 대부분의 수익은 정부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수취해 가고, 이는 Aid와 비슷한 효과를 낸다.

3. 그렇다면 Aid에 대한 통제는 왜 불가능한가? 조건을 달아서 한다고 해도, 쉽게 말하면 '배짱영업'을 해버리면 땡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time inconsistency'라고 부르는데, 시간이 변함에 따라 사정이 바뀌면 다른 행동을 해버리는 경우다. 즉 돈을 받고 나서 기존의 약속을 안 지켜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 지적하며 Aid를 그냥 중단해버릴 경우 aid industry 자체가 무너지며 수원국과 공여국의 연결이 끊기게 되고, 또 만약 조건을 달아서 돈을 준다고 하면 차라리 거절하고 구미에 맞는 조건을 다는 공여국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Aid industry가 경쟁적이기 때문이다.


주로 관심가는 내용들만 뽑아서 요약해 보았다. 요약 중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불평등에 대한 디턴의 입장은 절대로 긍정적이지 않다. 불평등이 경제 발전을 추동할 수 있다? 사실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불평등한 가운데 개발도상국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덜 포화된 시장이 있기에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디턴이 아니라 제프리 삭스도 역설한 것으로, 격차를 줄이는 게 쉽지 않을 순 있지만 당장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디턴은 세계 국가들 사이의 보건, 경제적 불평등을 정교하게 다듬은 통계와 함께 보여주면서 이것이 굳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언젠가 지구상의 모두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날을 꿈꾸는 듯하다. 그에게 좀 더 중요한 것은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잘 살게 되는 파레토 개선이다. 일부러 나서서 분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에, 그는 경제성장이 가져오는 긍정적 외부효과를 말한다. 성장에 대한 열망 속에서 지식과 기술이 개발되면 그것이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가난한 나라에도 파급되고 궁극적으로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해외원조의 대안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프리카에' 돈을 쓰는 것보다 '아프리카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이다. 돈을 직접 갖다주는 대신에, 말라리아와 같이 부국에서 관심을 갖지 않을 질병에 대한 연구에 돈을 투자하고, 또 아프리카 출신 인재들로 하여금 유학 와서 공부할 수 있게 장학금을 대주는 것이다. 또 국제적으로 빈국에게 불공평하게 되어있는 무역제한을 없애고, 각종 조약 등을 맺는 데 있어서 빈국들에게 부족한 전문인력을 제공하자고 한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성장과 불평등은 함께 가지만, 삶을 개선하는 혁신은 전파되며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Posted by nanunsaram